「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 김상훈 번역 / 행복한책읽기
SF와 판타지 등 장르문학을 즐겨 읽는 편이긴 하지만 말랑말랑한 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다 읽고나니 이 책에 대한 높은 평가에 속았단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책을 대중을 상대로한 홍보문구로 뒤덮는 건 일반대중에 대한 기만입니다. 상 받았단 말을 뒤로 빼고 뒷표지 상단의 설명을 띠지로 둘러, 추천도서니, 베스트셀러니 하는 문구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상당한 하드SF라 이쪽에 관심 없던 사람이나 과학적인 설정과 심도있는 사유(思惟) 같은 것 보다 이야기에 관심이 큰 사람에게 추천할만한 책은 아닙니다. 상은 많이 받지만 흥행에는 실패하는 영화와 상통한달까요. 대게 이정도 분량은 하루면 다 읽는데 이건 몇 달을 붙잡고 있었나 모르겠습니다. 저자의 수준이 높으면 딸리는 독자는 이럴 때 힘들어요. 그래도 알베르토 망구엘의 책처럼 읽다 포기하진 않았으니 소설이 맞긴 맞나봅니다.
각 이야기들에 대한 감상을 쓰자면, 읽기가 어렵다고 쓰긴 했지만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들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나오는 '바빌론의 탑'부터 뒤통수를 한대 치더라고요. 바벨탑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고 기독교 신화를 변주한 SF들도 흔하기에 그저 당시의 묘사가 세밀하구나 생각하며 슥슥 읽어나가는데 다 읽고 보니 실은 시침 뚝 떼고 딴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놀랐습니다. 그야말로 '어이쿠야!'하는 소리가 속에서 울려퍼지더군요.
그래서 다른 이야기들도 이와 같겠구나 싶어 부리나케 페이지를 넘기다가 '이해' '영으로 나누면'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난해한 용어의 홍수에 다른 방향으로 삼연타를 맞고 뻗었다가─실은 아직도 제가 뭘 읽은 건지 헷갈립니다─ '일흔두 글자'에서 간신히 회복했지 뭡니까.
이 중단편집에서 '일흔두 글자'가 제일 재밌었습니다. SF라기보단 스팀펑크 + 시침 뚝이지만 가장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살아있더라고요. 솔직히 다른 작품들은 제가 읽기에는 지나치게 사고실험 내지는 지적유희에 가까웠지 소설이라고 부를만한 건 아니었거든요.
'인류 과학의 진화'와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는 생소한 형태더군요. 앞의 글은 분량이 워낙 짧아 소설이라고 하기도 뭣한 수준이라 넘어가도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는 글의 생김새와는 다르게 토론의 형식을 띄면서도 소설다운 잘빠진 이야기였습니다. 두번째로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어요.
'지옥은 신의 부재'는 곤혹스럽더군요. 좋다고는 못하겠습니다. 이런 주제의 글로는 특별히 뛰어난 점 발견하지 못했거든요. 권말에 실려있는 인터뷰를 봐도 그렇고, 이런 식의 생각도 할 수 있구나 싶을 뿐입니다.
내용과 상관 없이 마음에 들었던 건 책 자체였습니다. 해설도 꽤 충실하고 인터뷰도 이해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번역자가 사용한 용어들 덕택에 한결 읽기 어려웠다는 걸 생각해도 원래 매끄러운 문장보단 가능한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한다니 할 말 없지요. 어쨌건 번역하는 분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가 번역한 걸 읽는 것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니까요.
한 번 읽어볼만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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