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은 올곧다. 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필기구들은 올곧다. 그 한결 같은 올곧음으로 주인의 의사를 써내려간다. 펜은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다. 그런 펜의 속성이 좋아서 항상 펜이란 것에는 애정을 갖고 있지만 펜에게는 또 하나의 속성이 있었다.
펜은 사치품이다. 흔히 문구점에서 파는 1회용 볼펜들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다. 좀 더 쓰기에 편하고, 좀 더 취향에 맞는
생김새의 펜을 찾다보면 어느새 펜의 값은 필기구를 넘어 사치품의 수준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그 정도 수준의 펜을 쓰는
사람들에게 종종 펜은 필기구가 아닌 장신구로 변질되어 있다. 그러한 속성은 싫다.
지금은 두 속성 사이에서 필기구
본연의 속성에 충실한 펜을 쓰고 있다. 빨강과 겅정 볼펜이 샤프와 한 몸을 쓰고 있는 멀티펜이다. 원래는 만년필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왼손잡이. 펜의 문제라기 보다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는 글쓰기 탓이지만 왼손잡이가 연필이나, 만년필을
쓰기에는 손이 적어놓은 글위를 지나가면서 묻고, 번지게 만드는 단점이 있었다.
이것은 학창시절에는 참기 어려울만큼
짜증나는 문제였다. 연필이나 샤프의 글을 쓸 때 사각거리는 촉감은 참 좋았지만 함참 필기를 하고나면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게 너무
불편했다.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과거에는 붓을 세워서 썼다는데 생각이 미쳐 붓을 써보려 했지만 그 부드러운 친구를 잘 다루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수양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결국에는 볼펜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종이와 아무런 협상도 대화도 없이 그저 미끄러지는 필기감은 매우 싫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쓸 수 밖에.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 느낌을 즐기고 있지만 말이다.
지금 주로 쓰고있는 것이 볼펜이지만 모든 쓸 것들은 다 좋아한다. 현재 볼펜과 함께 가장 많이 쓰고 있는 것은 키보드다. 쓰던,
두드리던,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 것은 훌륭한 필기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느긋이 손으로 쓸 때의 행복감과 손을
움직이는 즐거움은 펜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이 글 또한 펜으로 적은 것을 다시 정리해서 두드리고 있지만 아마, 키보드로만 썼다면 결코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며 이 블로그 또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다른 블로그를 만들면서 썼지만 이제 그블로그는 안쓸테다. 세 개나 운영하기는 너무 귀찮아서 다시 들고 왔다. 덕택에 마지막 두 줄은 의미불명의 소리가 됐구만.
어제 아침에 있었던 일. 퇴근하는 길에 어쩐지 빵이 먹고 싶어서 이것저것 샀다. 빵봉지를 손에들고 빵집을 나와 걷는데 몇 걸음
걷지도 않아 노숙자를 만났다. 노숙자를 만나서 싫은 건 아니다. 예전에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무슨 연유에선지 육교 위에서 그
비를 졸딱 맞으며 고개도 들지 못하고 가만히 엎드려서 구걸하는 분에게 가지고 있던 돈-몇 천원 뿐이었지만-을 다 드린 적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 노숙자는 내게 다가왔다. 건물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가 마침 내가 빵을 사가는 걸 보고 온 것이다. 그런데 "아저씨, 잠깐만." 하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다. "노숙잔데, 배고프니 빵 하나만 줘요."
뭐, 배고프면 적극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먹을 걸 나눠달라는데 야박하게 굴 것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일부러 제일 싸고 맛없을 것 같은 빵을 주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 이래서 노숙자가 된 건가.'
아직 그런 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태도다. 자기 보다 적어도 열 살은 어릴 법한 사람에게 먹을 걸 구걸하는데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마치 주는 게 당연하다는 태도가 어떻게 가능한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저 사람은 내게 구걸을 한 게 아니다, 빵을 주는 나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줬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은
길거리에서 '담배 좀 빌립시다.'하는 정도의 감각이었던 거다. 그까짓 빵, 사실 비싼 케이크 같은 것도 아니고 몇 백원에서 몇
천원 사이의 빵들인데 그 사람이라고 마음 먹으면 못 사먹을 리가 없었다. 다만 수중에 돈도 없고 마침 출출한데 먹을거 들고
지나가니 말이나 한 번 붙여본 거였으리라.
여태 나는 노숙자를 거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을 바꿔야겠다. 불쌍한 거지 같은 게 아니고 그냥 물질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보헤미안쯤으로 봐줘야겠다.
…라고 역시 다른 블로그에 썼었는데 생각해보니 이것이야말로 비록 지금 몰골이 비루하나 결코 비굴할 수는 없다는 선비의 풍모로구나.